모드 / 다이아몬드 에이스 / 미유키 카즈야×나츠키 키에×유이 카오루
* 작품에 등장하는 ‘유이 카오루’ 는 네타캐릭터입니다.
* 네타 (신 캐릭터 포함) 를 포함하고 있으니, 네타 및 스포일러에 민감하신 분들은 열람을 추천드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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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색으로 변해버린 나는
다시는 무채색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넌 그렇게 나의 마음을 너의 색으로 바꿔 버렸다
김정수 / 물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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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따듯하고 부드러운 봄바람을 타고 온 짝사랑이 유이 카오루의 마음 언저리에 닿은 지 한 달이 지났다. 짝사랑의 상대는 야구부의 매니저 나츠키 키에였다. 물론 이 사실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상태로 가슴에 꾹꾹 담아놓는 것이 유이의 최선이었다. 당연했다. 그녀는 이미 남자친구가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남자친구가 있는 사람을 좋아하게 됐다는 생각을 하며, 최대한 그녀의 생각을 떨쳐내려 애썼다. 그럴수록 짝사랑의 감정이 가슴 깊이 스며들 뿐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무도 모르도록, 자신만 알 수 있도록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억누르며 그녀의 앞에서 웃는 것이었다.
“나츠 선배, 죄송한데 수건 좀 주실 수 있어요?”
“수건? 말을 하지 그랬어. 땀 많이 나네. 물… 필요하면 가져다줄까?”
아, 아니요. 괜찮아요. 나츠키의 걱정에 유이는 방긋 웃으면서 괜찮다 답했다. 야구부 누구에게나 베푸는 호의일 뿐이다. 자기도 야구부원이니까, 그러니까 받는 호의일 뿐이다. 오해 따위를 해서는 안 된다. 필요한 게 있으면 다시 부르라는 나츠키의 말에 유이는 대답 대신에 웃는 얼굴로 답했다. 나츠키가 등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하자, 유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나츠키의 곁에 서 있는 선배. 쉽게 말하면 나츠키의 남자친구, 미유키 카즈야가 그 이유였다. 아. 순간 자신이 표정을 굳혔다는 것을 안 유이는 급하게 얼굴을 풀었다. 누가 자신을 목격하지 않기를 바라며.
‘…둘이 같이 있는 건 당연하잖아.’
유이는 쓰게 웃으며 몸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저녁의 봄바람이 유이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차갑게 불어왔다. 멍하니 서서 나오지도 않는 땀을 닦고 있으니 사와무라가 얼른 저녁 안 먹고 뭐하냐며 유이에게 소리쳤다. 유이는 사와무라의 말이 있고, 5분 정도가 더 지나서야 발을 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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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말이야.”
“응?”
“그 매니저 선배, 좋아하지?”
무슨 소리야. 억지로 밥알을 씹으며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밥을 다 먹은 세토가 유이의 곁으로 다가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유이는 무슨 소리냐며 대꾸했지만, 세토는 주위를 살펴본 뒤 몸을 숙여 유이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아까 표정 엄청나게 굳었던데? 그 선배랑 미유키 선배랑 같이 있으니까.”
“…그건 또 언제 본 거야.”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유이는 예상외의 봉변에 조금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아니야, 그런 거. 억지웃음을 지으며 세토에게 답하자, 세토는 그래? 라며 어깨를 으쓱이고는 유이의 곁을 떠났다. 답답해. 유이는 더는 밥을 억지로 구겨 넣을 수 없었다. 복잡한 감정이 배를 시작으로 온몸을 가득 타고 올라왔다. 유이는 속이 쓰려 오기 시작했다. 잘 먹었습니다, 가볼게요. 유이는 설거지를 하는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드리고는 그릇을 배출구 앞에 가져다 놓고는 빠르게 식당을 떴다. 밖은 이미 한참 어두워져 있었다. 밥을 먹고 시간이 남은 부원들은 그라운드를 뛰고있었고, 배팅연습을 하는 부원들도 있었다. 유이는 그런 부원들의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기숙사의 뒤쪽으로 걸어갔다. 예상대로, 기숙사의 뒤는 아무도 없이 한적했다.
“…선배는 매니저니까요. 그래서 누구에게나 베푸는 친절일 뿐인데.”
오해하는 제가 싫어요. 유이는 답답한 듯이 머리를 헝클었다. 기분 나쁜 한기를 담은 봄바람이 유이를 휘감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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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이 밝았다. 유이는 어제 세토의 말과 자신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한 티가 얼굴에 남아있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세면장으로 향했다. 아. 유이는 세면장에 있는 사람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미유키 카즈야. 현재로서는 유이의 기피대상 1위이자 가장 불편한 사람일 것이다.
“일찍 일어났네?”
“아, 네. 선배도요.”
“어차피 오늘 토요일인데. 연습이라도 하려고?”
그럴 생각이에요. 유이는 미유키의 시선을 회피하며, 그가 던지는 질문에 답했다. 미유키는 그런 유이의 반응에 재미가 없는지 이내 질문을 끊어버렸고, 세면장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먼저 간다, 후배님. 미유키는 유이의 어깨를 몇 번 두드리고는 세면장을 떠났다. 유이는 미유키가 떠난 자리를 잠깐 바라보다 이내 세안을 마치고는 그라운드를 돌고 있는 미유키를 뒤로하고 실내 연습장으로 향했다.
‘연습하면 머릿속에서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지워지겠지.’
유이의 선택은 연습이었다. 최대한 정신을 딴 곳으로 돌려, 머릿속에서 그녀를 떠나보낼 예정이었다. 부웅부웅 거리는 배트 소리가 연습장을 채우기 시작했고, 이내 유이는 조금씩 땀으로 물들어갔다. 온 몸이 땀으로 젖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고, 어느 새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나츠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선배?”
“아침부터 열심이네.”
“선배도 아침 일찍부터 부에 오셨네요.”
“응. 원래 이 시간에 오니까. …배팅연습 하고 있던 거면 계속해. 봐줄 테니까. 내가 보고 있으면 방해되려나?”
“아니에요. 괜찮아요. 연습하는 거 봐주실 수 있으면 저야 좋죠.”
유이는 넉살 좋게 웃으며 다시 배트를 휘둘렀다. 20분 정도가 지났을까, 이제 그만해도 좋다는 나츠키의 목소리가 유이의 귓가를 때렸다. 여기 수건. 땀범벅이 된 유이를 본 나츠키가 수건과 물통을 건넸다. 땀 많이 나는데, 괜찮은 거야? 나츠키가 인상을 찌푸리며 걱정스러움을 내뱉었다. 유이는 땀을 닦으며 괜찮다 답하자, 나츠키는 그럼 다행이라며 말을 마무리 지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아침 시간이 10분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대충 샤워하고 밥 먹어야 하지 않겠어?
“그러게요. 벌써 아침이네요. 갈까요? 선배도 같이 먹어야 한다면서요.”
“뭐…. 합숙 중일 때는 그렇지. 그럼 갈까?”
네. 유이가 배트를 제자리에 돌려놓고는 먼저 나간 나츠키를 뒤따라갔다. 얼른 와, 너 샤워하면 늦겠다. 나츠키의 말에 유이가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가,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무의식적으로 걸어가는 나츠키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방향으로 돌렸다.
“저기. 저. 선배, 잠시만요. 할 말이 있어요.”
“갑자기 놀랐잖아. 그것보다, 무슨 말인데?”
그게요, 그러니까. 좋아하고 있어요. 제가, 선배를. …아주 많이. 선배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많이요.
“아…. 그.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 말하려고 했는데, 선배 보자마자 까먹어버렸네요….”
“그래? 그럼 나중에 기억나면 다시 말해도 돼.”
“알겠어요, 얼른 가요. 선배 말씀처럼 정말 늦겠어요.”
유이는 가슴으로부터 시작된 고백을, 목구멍 밖으로 나오려는 그 말을 억지로 삼켜버렸다. 이미 자신은 그녀의 색으로 물들어있고, 그녀를 앓는 일이 잦았지만, 그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