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론 / 사이퍼즈 / 에스트로Gs×히카르도 바레타×에스트라

류아키☆륭키 2016. 9. 17. 19:05

 

 

 

 

 

 

 

 

 

 

길지 않은 여생을 살아오며 눈에 담아둔 대부분의 바텐더들은 내게 모두가 잠들 야음이 되고 나서야 제 직업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오묘한 말들을 남겨주었다. 어쩌면 서로 간의 암묵적인 합의가 아니었을까, 의심되는 규격화된 규칙에 나를 구겨 넣어 맞추는 것이 부정적으로 다가와 이내 뽑히지 않을 가치관 중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이 오늘따라 더욱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푸르스름한 달빛 조각이 하나의 샹들리에처럼 가게 안을 훤히 밝히는 오늘은 유독 손님들이 적은 밤이었다. 평소라면 진열대에 전시한 글라스들을 바 클로스로 섬세하게 어루만지며 주문을 받아야 할 밤 9시에는 개미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가게는 한적했다.

 

정적으로 가득 채워진 가게를 지키는 행동에서 더 이상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추측이 확신으로 자리잡고 나서야 이미 반쯤 풀어헤쳐져 일부가 땅에 끌리는 앞치마를 공처럼 말아 열린 락커 틈 사이로 분풀이를 하듯 집어 던졌다. 바닥과 문에 충돌해 바닥으로 떨어질 위기를 간신히 모면했지만 긴 끈은 락커를 빠져나와 미처 치우지 못 한 바닥의 먼지가 묻는 다는 걸 알면서도 의욕이 나지 않는 몸을 일으켜 뒷정리를 마저 하기엔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 오늘은 날이 아니구나. 다만 이런 생각이 머리에 들어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은 채 끝내 마지막 남은 의욕의 뿌리마저 삼켜버렸다.

"에스트로."

10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을 가르쳐주는 시계의 기계적인 시선을 가볍게 무시한 채 입고 왔던 외투를 손에 집고 입으려 하는 찰나에 익숙한 목소리가 언제나와 같은 호칭으로 나를 멈춰 세웠다. 너의 목소리, 내 마음이 행하라 하는 가장 엄중한 명령의 시발점이 내 귀를 지나칠 무렵 이미 나는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 출입문을 바라보았다.

"바레타. 아쉽게도 오늘 장사는 여기까지야."

"전에도 말했던 거 같다만, 네 농담은 언제 들어도 재미없다고."

그래, 그랬었지. 손에 쥐고 있던 외투를 다시 락커 안 옷걸이에 걸고선 제 일자리로 돌아가는 나를 보며 네가 말했다. 꽤 멀지 않은 과거의 일을 깨닫게 해주는 너의 말에 익숙하다는 듯 옅게 미소를 띠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 주일 전에 네가 그 말을 했었다는 영양가 없는 말은 구겨질 대로 구겨져 허리에 두를 생각조차 안 들게 하는 앞치마처럼 입안에 맴돌려 하는 것을 조금은 힘겹게 막아낸 내 앞에서 너는 그런 속조차 관심이 말없이 작업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Kissing Bug, 가게를 연 중반 무렵 스스로 창작한 레시피에 맞춰진 독특한 술병을 서랍장 구석에서 꺼내어 쥐곤 네 앞에 흔들고 나서야 너는 작업대에서 가장 가까운 의자를 꺼내 앉았다. 짧더라도 이 시간에 굳이 찾아온 이유를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너에게 못 마땅하다는 생각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표정을 띤 채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 정도의 침묵이라면 예전에 동생이 술김에 내뱉앴던 매력 중 하나라 말한 과묵함도 민폐에 가까울 거라는 생각에 괜한 심술을 부려볼 의향도 있었으나 주인 대신 앞서 네가 이곳에 오게 된 연유를 쉴 새 없이 떠벌리는 어두운 표정에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접은 채 글라스를 꺼내 네 앞에 내려놓았다.

"싸우는 거까지는 말릴 생각 없지만 닮은 나한테 화풀이하러 오지는 마."

"싸우지 않았다. 다툼도 없었고."

동시에 입을 연 우리의 말이 다른 뜻을 의미한다, 결국 둘이서 크게 한바탕 일을 벌였군. 정갈한 옷차림을 위해 닫아두었던 양팔의 커프스 버튼을 풀어 슬리브와 함께 팔뚝까지 접어올린 오른팔을 뻗어 곱게 밀봉한 술병의 뚜껑을 열고선 앞에 놓인 두 잔의 글라스에 술을 따랐다.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방울들이 모여 한 잔을 채울 때쯤 불쑥 튀어나온 네 손이 앞에 있던 잔을 가져가더니 빠르게 본인만 모를 원인이 유발하는 목구멍안에 술을 집어넣어 갈증을 적셔나갔다. 그 안에는 잠깐의 휴식도 없어 나는 당연히 너를 걱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 왜 계속 마시는 건데. 바텐더가 말리려 할 정도로."

"마시고 싶었으니까."

 

두 번이나 술잔을 비운 너를 부담스러운 시선이나 말도 안 되는 농을 던져도 내게 되돌아온 답은 없었다. 이미 알아차린원인에 대해 입을 다문 너를 어떻게 해야 진실된 사건의 경위를 들을 수 있을까, 텅 빈 너의 술잔에 다시 술을 따라주며 생각할 겨를도 없이 매번 함구해야 했던 물음이 목소리를 훔쳐 내 입에서 치고 나왔다.

"네 친구인 나랑같이?"

"장난도 적당히 해."

말을 한 당사자인 나도 적잖이 놀라 계속 유지하던 표정이 한 번에 일그러져 꽤나 우스운 꼴이 되었겠지, 거울을 앞에 뒀다면 꽤나 볼만한 표정일 거라는 자괴감이 실린 생각 따위가 내 머리에 담겼다. 꽤나 무게감 있는 말을 뱉었는데도 침묵만을 유지하는 너의 반응에 장난이었다며 제 잘못을 무마시키려 고개를 들어 시선을 위로하자 복잡한 표정으로 절대 내려놓을 거 같지 않던 술잔을 내려놓은 네가 보였다.

 

친구, 너의 생각에 담긴 것은 선천적인 곱슬로 인해 나무 덩굴처럼 뒤틀린 백발과 올리브유를 닮은 녹안을 가진 까미유 데샹. 이제 제법 친해져 저런 장난도 웃으며 넘길 거라 생각한 나의 기대가 한 번에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친구의 자리에라도 남고 싶어 하는 이를 앞에 두었으면 서, 자신을 버린 이를 생각한다. 그리운 마음은 아니라도 결국 나를 포함한 네 연인, 에스트라마저 알 리 없는 복잡한 생각에 잠긴 너의 고요한 대답은 참으로 현실적이었다.

 

"장난이야. 내가 네 친구가 아니듯 넌 그저 내 동생을 빼앗은 놈이지."

"...그런가."

 

그렇다면 나도 현실적으로 답을 해야겠지. 겨우 일궈내어 비닐보다 얇은, 사로 안면을 튼 사이라는 관계를 한 번에 무너트릴 수는 없으니까. 내가 지금 느끼는 이 괴로움, 너로부터 새어 나오는 독을 삼키는 행위를 네게 돌려보내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내게 찰나의 해방감을 줄 뿐 결국 이 괴로움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나의 몫이어야 한다. 모로 누울 때마다 거슬리는 잠자리도 숨을 쉴 때마다 폐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아려오는 심장을 뛰게 한 것은 너일지라도 막지 못한 건,

 

"에스트로 오빠."

 

나 자신이니.

 

"제대로 찾아왔네, 에스트라. 네 애인 좀 말려봐. 이걸 다 마시려고 한다!"

"제대로 미쳤네."

 

이곳에 올 거라 예상도 못 했던 반가운 손님의 등장에 조금 전까지 입안에 머금고 있던 술도 삼키지 못 한 네가 등을 돌렸다. 에스트라, 싸웠든 싸우지 않았든 지금은 잠시나마 짧은 거리에 서서 피하고 싶었을 자신의 애인이 제 뒤에 서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너는 입에 머금었던 술을 삼키곤 동생의 행색을 살폈다. 참 빠르기도 하지. 이제야 그의 눈에는 동생이 얼마나 급히 나왔는 지 또 제 걱정은 얼마나 했는지 보이려나. 평소 짧은 거리를 외출하더라도 제법 모양새가 갖춰진 옷으로 환복하는 버릇이 있어 깔끔한 차림으로 나타났어야 할 그녀가 평상복은커녕 외투를 걸친 잠옷 차림, 그것도 꽤 추운 날씨에 슬리퍼로 나타난 게 이제야 눈에 보였는지 너는 적잖이 놀라 방금까지 앉았던 의자에 내려와 어정쩡한 자세로 동생을 반겼다.

 

이제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평소라면 손님으로 북적거렸을 가게에 주인 허락도 없이 전세를 낸 커플 한 쌍에게 이젠 질린다는 식의 농담을 던지며 가게 유리문에 붙은 팻말을 돌렸다. 푸른 물감으로 적힌 'Open'이란 단어를 나를 향하게 하고 뒤를 돌아보자 억지로 너의 품을 지비고 들어가 안은 동생과 허공에 떠있던 손을 동생의 머리에 올려 천천히 쓸어내리는 네가 서있었다.

 

"애정행각은 나가서 하지그래. 장사 방해되잖아."

 

순식간에 따스한 여러 감정으로 가득 찬 가게 안을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둘에게 말했다. 너는 나의 말을 듣지 못 한 듯 머리를 쓸어내리던 손으로 조심스레 동생을 품에 안았고 동생이라는 녀석은 들었음에도 이미 끌어안은 너를 세게 옭아매듯 다시 한 번 끌어안았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둘 다 진작에 출입하지 못하게 했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