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엘 / Fate 시리즈 / 코토미네 키레이(4차)×코토미네 루리×코토미네 키레이(5차)
“키레이 아가, 혹시 오늘 약속 잡은 적 있니~? 아니면 오는 길에 원한이라도 산걸까~?”
“전자는 기억에 없다만, 후자에 대해서라면 내가 대답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기억에 없을 뿐, 누군가의 원한을 샀을 가능성은 있지 않겠나.”
“역시 그러니? 흐으음, 아가가 그리 말한다면 그런 거겠지만…….”
확실한 대답을 듣고 나서도 루리는 좀처럼 한자리에 있지 못하고 있었다. 살풍경하고 음울한 방에서 총총 돌아다니는 경쾌한 숙녀의 스텝은 이질적이었다. 따지자면, 이 세상의 모든 악이라는 호칭을 일부 떠맡은 숙녀가 정갈한 수녀복과 십자가를 몸에 두르고 있다는 것부터 괴리감을 형성하고 있는 셈이겠지만.
어쨌거나, 데미 서번트인 코토미네 루리에게는 ‘기척 감지’ 스킬이 있다. 말 그대로 기척을 감지하는 능력. 특히 원거리의 기척도 잘 느낄 수 있고 랭크가 비교적 높게 매겨진 탓에 유용하다면 유용한 능력이다. 그렇기는 해도, 그 능력으로 인해 헤매는 모습은 코토미네 키레이가 보기에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성배전쟁은 시작하지도 않았으니 길가메쉬 이외의 다른 서번트의 기척을 느낀 것은 아니니라. 그렇다면?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이 키레이로 하여금 펜을 내려놓게 했다. 착실한 성격에 걸맞은 필적이 꾹꾹 눌려 쓰인 업무용 서류에서 떨어졌던 눈길은 이제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인물의 형상에게 쏠렸다. 정말이지, 쏠릴 수밖에 없었다.
“어? 어……, 아가?”
“그래, 루리. ……흠?”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키레이 아가잖아? 따지자면 어린 키레이 아가지만?”
같은 십자가. 같은 목소리. 하지만 앳된 티가 남은 얼굴이며 짧게 잘린 머리칼이며 아직 고뇌에서 벗어나지 못한 무거운 눈빛 등은, 이 웅장한 교회의 현 주인인 ‘코토미네 키레이’와는 다른 ‘코토미네 키레이’임을 명백하게 만들었다. 이 동일인물을 구분하자면, 놀란 채 아직도 문고리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비교적 어린 (어린 코토미네는 인상을 쓴 반면 현재의 키레이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코토미네 키레이와 앉은 자리에서 놀라움을 흥미로움으로 바꾸고 있는 현재의 코토미네 키레이로 나눌 수 있겠다.
“아, 아가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것 같은데 잠시 꼬집어 주겠니?”
“…원한다면.”
“…알았다.”
“아얏?! ……후후후, 역시 꿈이 아니구나! 이게 바로 양손의 꽃, 양손의 아가……?”
키레이와 어린 코토미네는 한 호흡동안 서로를 쳐다보고 다시 동시에 뺨을 꼬집었더랬다. 비록 핏기 없던 루리의 양쪽 뺨은 연지를 찍은 것처럼 붉게 물들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행복이 농밀한 표정으로 웃었을 뿐이다.
“일단 확인 차 질문을 하도록 하지. 괜찮나?”
“좋을 대로. 질문에는 성실하게 대답하마.”
“정체가 뭐지? 만약 마술이나 흉내라면, 악취미에도 정도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그건 이쪽에서 해야 할 대사 같다만? 여기서 지내고 있던 건 우리 쪽이었으니.”
“과연. ……그렇다면 서로가 서로를 믿지는 못하겠군.”
“물론. 네놈이 정말로 나라면 방침을 잘 알 텐데.”
“모를 리가 없지 않나, 예전의 ‘나’. 신뢰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신용의 증거지.”
별도의 안내 없이도 자연스럽게 침대에 걸터앉은 어린 코토미네는 루리보다는 키레이 쪽을 수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무리도 아닐 테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거는 것도 모자라 오히려 자신을 동물원의 희귀동물이라도 보는 듯한 시선으로 관찰하고 있다면 어떻겠는가. 일상에 젖어 사는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매우 놀란 나머지 현실에서 도피하거나 눈앞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에 시간이 걸렸겠지만, 이전이나 지금이나 코토미네 키레이라는 인물은 비일상 측에 속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반응이며 경계였고 대답이었다.
손님으로서 대접하기에는 너무나도 친밀한 사이이고, 코토미네 키레이 본인으로서 대접하기에는 이상한 기분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루리는 다른 것보다도 커피와 홍차 사이에서 무엇을 내주어야 할지부터 고민하고 있었다. 차라리 두 가지를 섞어서 줘버릴까? 같은 장난스러운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결국 생각에 그치고 만 건, 직접 실행하기에는 후폭풍이 상상되지 않았던 탓이다.
“내가 기억하는 건, 귀환하자마자 짐을 풀기 위해서 내 방에 간 것까지다. 어디서부터 혼선됐는지는 감이 잡히지 않아.”
“아마 교회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겠지. 루리가 낯선 발소리에 짖어대는 개처럼 민감하게 반응하더군.”
“그랬군. 이 여자는 옛날부터 그런 것에 예민했으니 그렇게 반응하는 것도 당연한가.”
“다시 돌아갈 단서가 잡힐 때까지는 여기서 묵도록 해라, 예전의 ‘나’. ‘내 방’이자 ‘네 방’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서로 착각당하면 좋을 게 없겠지.”
“이해가 빠르니 다행이군.”
같은 톤의 같은 목소리가 실시간으로 오고가는 것이란 생각보다 소름이 돋는 일이다. 정작 두 코토미네 키레이가 자각이든 무자각이든 즐기고 있어서 그렇게 보이지 않을 뿐이지. 분명한 건, 지금 두 사람의 웃음은 닮은 듯 닮지 않았다. 어느 방향으로나 일그러진 거울이다.
결국 커피도 홍차도 고르지 못했던 루리는 와인잔 두 개를 각각에게 배분했다. 일방적인 유열, 혹은 구도자求道者와 각성자의 설전은 예상 외로 일어나지 않았다.
이걸 아쉬워해야하는 걸까, 아니면 다행으로 여겨야하는 걸까.
두 가지 생각을 매달고 돌아가는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는다. 와인의 붉은 색만큼 그녀의 눈빛의 깊이도 달라진 대신 잔을 채워가는 창백한 손만큼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술……인가.”
“혼자 마시는 건 싫어하지만, 같이 마실 상대가 있다면 괜찮잖니? 그렇지, 어린 아가~? 아니면, 아직은 ‘애송이’라고 부르는 편이 어린 아가에겐 익숙하게 들리려나?”
코토미네 루리라는 존재는 데미 서번트이기 이전에 말 그대로 산송장이나 다름없었다. 언제나 입술은 파랗게 질려있고 손톱도 변색된 지 오래였다. 물론, 체취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좋았다. 그럼에도 어린 코토미네는, 잔에서 찰랑거리는 와인을 비우기가 무섭게 그 단련된 전성기의 단단한 팔을 루리의 허리께를 두르고, 어렵지 않게 가까이 당기고, 좁은 등에 코끝을 묻었다.
내 소유물이다, 따위의 사사로운 주장은 결코 아니다. 그럴 만한 나이도 아니며,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입장을 따지자면 어린 코토미네 자신은 이 세계의 손님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원래 세계에 남겨져있을, 언젠가 다시 만나야만 할, 어쩌면 만나고 싶지 않을 앳된 코토미네 루리에 대한 애증의 무의식적 발로였다. 수십 년째 유지하고 있는 외모와 머리 형태, 그리고 세월이 지나도 아이를 대하는 듯한 여전한 태도만 해도 아른거리는 먼 날의 향수를 부르기엔 충분했다. 거기에 여태껏 별 감흥도 없었던, 비아냥거림에 가까웠던 호칭이 어린 코토미네의 관자놀이에 대고 방아쇠를 당긴 셈이다. 아득했던 감각이 현실로 돌아온 그의 팔에서 힘이 풀리더라도 루리는 여전히 무방비한 등을 맡겼다.
“어쩜. 어린 아가는 아직 ‘나’랑 재회하지 않은 시기의 아가였나 보구나?”
“……….”
“미안하구나, 어린 아가. 워낙 내가 보는 눈이 없어서 생김새만으로는 영 구분하기가 힘들다보니~?”
“꼭 노인 같은 소리를 하는군. 뭐, 그것도 내 나이에 몇 배나 되는 햇수를 살았으니 당연할지도 모르겠군.”
“키레이 아가……어라, 이러면 헷갈리겠는걸. 흠흠. 나의 큰 아가, 그런 뼈아픈 사실을 말해버리면 나중에 혼낼 거란다? 어린 아가도 듣고 있잖니.”
“정당한 방식의 복수라면 받도록 하지. 네가 할 수 있다면.”
자리에서 일어선 키레이가 루리의 두 갈래로 땋인 옆머리를 쥐며 상체를 숙였다. 풀지도 않으며 자르지도 않는다. 그저 담담하게 입술을 대었다가 떼었을 뿐이다. 십자가에게 그러하듯이, 파랗게 질린 입술에게 그러하듯이. 손아귀에서 풀려난 옆머리가 미지근한 온기를 피부에 전달해주었다.
“큰 아가, 어디 가려고?”
“식사 준비다. 식사가 필요 없는 너는 예외로 둔다고 쳐도, 나나 거기의 미숙한 나에겐 필요한 행위지 않나.”
“어? ……후후! 그것도 그렇겠구나. 나 같은 것과 아가들을 똑같이 생각하면 안 되는데 가끔 실수하게 되지 뭐니. 잘 다녀오려무나.”
“그래, 다녀오지. 오래 걸리진 않을 거다.”
“당연하지 않겠니. 네가 누구의 아가인데.”
조르기 위한 교태까지는 불필요하다. 배웅에 필요한 건 고집이 아니라 웃는 얼굴이다. 10년의 세월이 준 깨달음이었다. 배웅의 보답은 어깨에 걸쳐주고 간 사제복 상의였다. 그것만으로도 루리는 만족한 양 손을 흔들었더랬다. 돌로 만들어진 벽에서부터 배어나는 한기는, 이제 완벽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적막이 지배하게 된 사실에서, 루리는 그 자리에서 뒤로 돌아서서 등 대신 가슴으로 어린 코토미네의 머리를 받아주었다. 상황의 파악과 더불어 타개책을 마련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느라 필사적인 그가 제 품에 이마를 대고 고요하게 휴식을 취하는 모양새가 역시나 썩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만약 단 한번이라도 그를 예뻐하게 된다면 그것을 과연 바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언제나 서로의 소유였다지만 오로지 서로의 시간대만이 다른 이번 경우만큼은 그 순간이 닥치지 않으면 모를 테다. 어차피 어떤 답이 기다리더라도 최종적으로는 유열이 있을 것이다. 설령 타인의 이해를 받지 못한다고 해도. 아니, 애초부터 타인의 이해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고개를 든 고뇌 어린 얼굴과 마주한 이 세상 모든 악은 새삼스럽게 배부른 듯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