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지 / 하이큐 / 우시지마 와카토시×도희연(련)×아즈마네 아사히
* 창작AU
네 울음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나는 소용돌이치는 불길에 몸을 기꺼이 던지고 싶지만
네가 냉정히 나를 그저 내려다본다면
차라리 네게 천천히 스며들어
나의 색으로 너를 물들일 것이다.
***
옆에 놓아둔 시계를 흘긋 보았다. 괜찮다. 아직은 안전범위 안이다. 그 안전범위라는 것을 과신했다가는 어느 순간 훅 가버리겠지만. 실없는 생각을 떨치며 다시 조준경으로 눈을 돌렸다.
십자선을 눈에 계속 담으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비워지지 않는다. 온전한 자신이 이곳에 없다. 걱정되는 것일까.
무엇이?
조정에 문제는 없다. 출발하기 전에 두세 발, 저격지점을 잡고도 두어 발을 더 쏘면서까지 영점을 확실히 맞췄다. 혹 중간에 틀어진다고 하여도 단 한발이면 탄착지점을 확인하고 다시 잡을 수 있다. 지겹도록 해왔기에 몸이 기억하는 것. 아마 잠이 덜 깬 상태에서도 가능할 것일 테다. 실력은 충분하다. 긴장도, 걱정도 필요 없다. 늘 하던 대로, 할 수 있는 것을, 지금 해야만 하는 것을 할 뿐이다. 이곳은 아직은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은 전환점. 앞으로의 격전을 위한 발판.
흘려보내자.
고요하게 가라앉히자.
괴물도 아닌 일반 병정개미가 빗소리에 가린 총소리, 그것도 소음기를 단 총의 발포소리를 들을 수는 없다. 이는 보통일뿐만 아니라 우선적으로 확인한 사항이다. 탄환에 꿰뚫리고 나서야 알아차리겠지. 그러면 늦었다. 저는 이미 목적을 이루고 떠난 후다. 그렇게 폭풍을 몰고 오는 거다. 해야 할 일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전부.
아, 녹아든다. 드디어 모든 걸 내려놓고 저를 던져 넣었다.
***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고요하다. 여전히 노려할 곳은 보이지 않는다. 다시 시계를 흘긋 보았다. 안전범위는 넘어섰다. 이제는 허용범위다.
역시 위압감을 조금 풍기면서까지 고집을 피운 것이 정답이었다. 이건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희미한 기회다. 병정개미조차 가지고 있는 걸 우리는 아직 가지지 못했다. 기다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시간을 억지로 잡아끌어 늘려야만 한다. 그것이 제가 온 이유. 턱 밑으로 내린 마스크를 코까지 올려 덮었다. 적지 않은 시간 앉아있었던 탓에 굳은 몸을 조금이나마 푼다. 저격을 고집하는 건 제 목을 조르는 행위. 포기하는 건 덫으로 뛰어드는 꼴. 그렇다면 직접 움직여서 길을 만드는 수밖에. 마침 균열도 일어나주고 있으니 이용할 수 있는 건 죄다 이용해주는 게 도리겠지.
소리를 죽여 발걸음을 옮겼다.
***
점점 굵어지던 빗줄기는 어느새 거세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겠지. 게다가 벌레도 꼬였다. 흔적은 비가 씻어 내린다. 그러니 신경을 더 날카롭게 벼려내자. 바뀐 것이 없었다. 바꿀 필요도 없었겠지만 그보다는 바꿀 수 없었다는 게 맞을 테다.
꽉 물은 어금니에 힘이 들어간다.
굵은 빗줄기 사이에 익숙한 인영이 있었다. 이를 악물고 달리는 저를 가만히 지켜보는.
***
“왔다!”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누가 닦을 것 좀 갖다 줘.”
투쟁을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밝고 시끄럽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모여서는 재잘재잘. 밖에서 잔뜩 뒹굴다 온 사람인데 아무렇지 않게,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둘러싸고는 더러는 제가 짐을 받겠다며 손까지 내민다.
이때껏 살아온 곳과는 정반대의 세상이 너무 따뜻해서 도리어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 느릿하게 흘러내리는 선혈을 무시하며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저기, 일단은 털어내야 하니까.”
“빨리 하고 쉬고 싶은데, 협조해주지 않으려나.”
눈까지 살짝 휘어 접으며 말하니 바로 반응이 온다.
겨우 샤워까지 마쳤다.
평소보다 지치는 하루다. 적어도 열댓 명이 제 탄환에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이제 흐릿해졌다. 금방이라도 잠이 들고 싶었으면 빼먹어서는 안 되는 일이 아직 남아있다. 보고를 하고 앞으로의 행태를 논해야 한다. 따뜻한 우유를 받아 자리에 앉았다.
집중한답시고 노력하는 듯 했으나 전혀 되지 않는 게 훤히 보인다. 아마 건네받은 두꺼운 이불을 둘둘 말고 있는 것이 꽤나 생소한 모양일 테지. 평소 저와는 달리 우스운 꼴이라는 건 알지만 별수 없으니 조용히 데운 우유를 홀짝였다. 입으로부터 식도를 타고 따뜻함이 퍼진다. 그만큼 마음은 싸하게 식어간다.
“…그래서 벌레를 이용했어.”
“그럼 그쪽에 피해가 많이 생겼겠네.”
“아니.”
무겁다.
점점 가라앉는다.
“그가 있었어.”
“벌레 같은 건 단숨에 처리했겠지.”
“운이,”
“좋았어.”
아무도 모르게 볼 안쪽을 깨물었다. 씁쓸한 피맛이 입안을 맴돌아 우유를 들이켰다. 맛을 채 느낄 겨를이 없다.
“비가 많이 와서 다행이었네.”
“그래도 다음에는 그냥 물러나. 너 혼자 너무 위험해.”
“맞아. 놀랬어. 협력하러 가는 중이었는데 벌써 빠져나와서.”
“호에, 나 그렇게 신뢰받지 못한 걸까나.”
“아니, 아냐. 렌만큼 저격실력이 좋은 사람이 어디 있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도 다 렌 덕분이고.”
단 한마디로 당황하고 우물쭈물한다. 매번 똑같은 반응. 이래서야 모르는 척하는 게 더 어렵지. 그와는 다른 의미로 훤히 보이는 모습은 꽤 귀엽고 재밌어서 항상 놀리고 싶은 욕구를 자극한다. 몇 마디 더 던져서 다른 애들에게 물어 뜯기도록 하고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거센 빗줄기 사이에서 화약 냄새를 맡으며 뛰어들었던 것이 흐려진 꿈으로 느껴질 정도로 평화롭다. 살짝 올라간 입 꼬리를 느끼며 남은 우유를 마저 마셨다. 화기애애한 소리를 배경으로 마음은 더더욱 무겁게 가라앉는다. 평소의 곱절은 피곤한 하루다. 눈을 감아버리고 싶다.
오늘은 네가 모든 걸 잃어버렸던 날이다.
***
운이 좋았다? 그건 거짓말이다. 그 녀석은 제가 근처에 왔을 때부터 눈치 채고 보고 있었을 터다. 모르는 게 이상하지. 몇 년을 함께 해왔는데. 봐, 지금도 단번에 찾아냈잖아?
***
“ .”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도 같이 웃었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네가 그 시간에 멈춰있다면 나는 그 시간 속에 갇혀있다. 돌아가고 싶지 않을 리 없다. 하다못해 아무 것도 모르던 조금 전으로라도 돌아가고 싶다. 그렇지 못했던 과거를 후회하며 조금의 희망이라도 간직한 채로 홀로 후회하고 앓다가 죽는 게 차라리 나았다.
네 앞에서 내가 죽으면 너는 무너질까.
“렌?”
손을 살짝 얹었을 뿐인 어깨가 뜨겁다. 잠길 것 같은 목소리를 억지로 채 올리며 떨림을 숨겼다.
“왜?”
“어? 어, 아니. 그게”
“호에에. 놀림 받은 걸까나.”
가볍게 눈까지 휘어 접었다.
‘희연.’
‘너에게 그렇게 불리고 싶지 않다.’
‘련, 이제 그만 돌아가지.’
비릿한 혈향이 입안 가득히 차올랐다.
네가 싫다. 네가 너무도 싫어서 너를 죽여 버리고 싶지만 죽일 수 없다. 네가 죽는 걸 상상할 수 없다. 네가 너무 강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어서 돌아갈까, 아즈마네 군.”
“주변에 아직 있을지 모르니까 조금 더 상황을 보다가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흰 수리잖아? 그럼 눈썹 휘날리도록 튀어야지.”
그렇다면 네가 나를 죽여야지. 내 모든 걸 모조리 앗아간 그 손으로 내 목숨도 앗아가야지.
“그러다가 들키면 어쩌지.”
“안 들키도록 해야지. 아사히라면 할 수 있잖아?”
그제야 네가 모든 걸 잃었음을 깨닫길 바라.
그것이 돌아가고 싶었지만 돌아갈 수 없었던, 이제는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곳이 없어진 내가 너에게 해주는 최초의 복수이자 최후의 축복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