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oruen / 옥도사변 / 타가미×에노키×사에키

류아키☆륭키 2016. 9. 17. 18:05

 

 

 

 

 

 

 

 

 

 

 

연적이라는 단어는 기본적으로 좋은 느낌은 들지 않게 만들어 져 있었다.

연적. 풀어 말하자면 사랑의 적. ‘이라는 단어가 붙은 이상 친밀감을 가지기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연애의 적이라면 더한 법이지. 제 애정관계를 망칠 수 있는 상대를 좋아하는 자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타가미와 사에키는 서로에게 저 단어를 붙이려고 할 때 마다, 묘하게 이 흉악한 단어가 너무나도 부드럽고 애교 있게 보이기까지 했다.

 

저 녀석은, 그 녀석은, 연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것이 공통된 두 사람의 생각.

 

에노키는 특무실의 홍일점으로 모두에게 살갑고 다정한 좋은 동료였다. 사근사근 말을 걸어와, 까르르 웃고,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쉽게 공감하다. 옥졸답다고는 할 수 없는 성격이지만, 호감을 사기엔 이만큼 적당한 성품이 없겠지. 당연하지만 특무실에서 그녀의 평판은 아주 좋은 편이었고, 아마도 그녀를 연애적인 의미에서 좋아하는 사람도 한 손에 다 꼽을 정도는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가미와 사에키가 서로에게만 유난히 연적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싫을 만큼 상대방에게 적대감을 불태우는 것은 어째서인가.

 

, 잠깐. 아파요 타가미

 

타가미. 그녀의 입으로는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 나오자 사에키는 상자를 옮기다 말고 멈춰서 에노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이 같이 있나? 상상만 해도 기분이 나빠진다. 얼른 짐을 옮겨야 한다고 서두르는 것도 잊은 사에키는 문이 열려있는 단련장 쪽으로 고개를 내밀었고, 별로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내팽개쳐진 무기들. 약간의 피와, 땀의 냄새. 단련이라도 한 건가. 둘이서?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타가미는 단련보다는 낮잠을 좋아하고, 에노키는 평소에 키리시마나 타니자키와 단련을 하지 타가미와는 자주 겨루지 않았는데. 도대체 둘 사이에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 걸까.

 

엄살 부리지 마. 겨우 뼈 좀 어긋난 것 가지고

아픈 건 아픈 거예요! 으으

이겨놓고 자기가 더 엄살이야

 

. 가볍게 혀를 찬 타가미는 피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정황 상 승부는 에노키가 이긴 모양이지만, 서로 입은 상처는 비슷해 보였다. 둘 다 봐주면서 하는 법을 모르는 타입이니, 이상할 것도 없겠지. 사에키는 초조한 눈을 느리게 깜빡이고 단련장 쪽으로 다가갔다. 에노키의 상처가 신경 쓰이기 때문이었다.

 

으으

 

뼈가 어긋났다고 했는데, 무릎 쪽이 잘못 된 건가. 타가미에게 다리를 붙잡혀 울상 짓고 있는 에노키는 그의 손짓 하나하나에 몸을 움츠리고 신음을 흘렸다.

그녀가 아파하는 걸 즐기기라도 하는 걸까. 타가미는 아프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하는 에노키를 무시하고 뼈를 맞추는 것에만 집중했다. ‘가만히 있어’ ‘옳지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말투에는 상냥함이 없었다. 그저, 우는 아이 손에 사탕을 들려주는 듯 무성의 한 최소한의 성의 뿐.

 

뭘 하는 거야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다. 어째서, 그렇게나 좋아하면서 못살게 구는 걸까. 애초에, 타가미는 제가 에노키를 좋아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졌다. 사에키의 눈에 비치는 타가미는 그저 가지고 싶은 장난감이 제 뜻대로 되지 않자 화를 내는 아이처럼 보일 뿐이었다. 에노키는 소유물이 아닌데, 왜 저렇게 구는 것인가. 왜 저 다정함에 똑같이 손을 내밀어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 상냥함을 잔뜩 이용하고 혼자 독차지 하려 하는가. 그런 건 진짜 애정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사에키는 도저히 타가미만큼은, 연적이라고 인정하기도 싫었다.

 

됐어, 나중에 마츠모토한테 가보던가

 

몇 번이나 다리를 주물럭거리던 타가미는 곧 귀찮다는 듯 손을 털고 일어났다. 아직 피가 멎지 않은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인상을 찌푸린 그는 곡괭이를 챙기고 문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이크이대로라면 보고 있었던 것을 들키고 만다. 사에키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자리를 뜨려고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었다.

 

뭘 그리 보고 있어?”

 

아아. 아직 열 발자국도 떼지 않았는데.

사에키는 어느새 단련장을 나와 자신을 보고 있는 타가미를 향해 억지로 웃어보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는, 형식적인 미소를.

 

그냥, 소리가 나서 뭔가 싶어서 본 것뿐이야. 누가 단련이라도 하나 싶어서 말이야

그런 것 치곤 너무 오래 보고 있지 않았나?”

……

 

언제부터 눈치 챈 거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사에키의 견고한 미소에 순식간에 금이 갔다. 역시, 이 녀석은 싫다. 이런 면이 너무나도 참을 수 없이 싫다.

 

물론, 처음부터 싫어했던 건 아니지만

 

에노키가 오기 전까지 타가미는 그렇게까지 불편한 동료는 아니었다. 사실 지금도 에노키를 향한 감정만 빼면, 그렇게 미워할 이유는 없기도 했고 말이다. 싫은 건 타가미 그 자체라기 보단, 역시 그 애정의 방식이었다. 자신은 절대 공감 할 수 없고, 하고 싶지도 않은.

 

어깨, 치료받는 게 좋을 거야

그런 소릴 하고 싶었던 건 아닐 텐데?”

그럼, 듣기 싫은 소리 쪽을 원해?”

 

아무리 성인군자라 해도 참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 사에키는 몇 번의 자극 끝에 방어용 웃는 얼굴을 거두었다. 공기를 얼어붙게 하는 차가운 무표정. 보통 사람들은 이쪽의 사에키를 불편해 하겠지만, 타가미는 달랐다. ‘그렇게 나와야지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눈동자로 상대방에게 다가간 타가미는 사에키가 들고 있는 상자를 장난스럽게 툭 건드렸다.

 

어차피 다 보이는 위선보다는 대놓고 적대하는 게 낫거든

솔직한 게 좋다는 거야?”

그런 의미는 아니고, 네가 뭘 생각하는지는 눈에 다 보여

그건 타가미 쪽도 마찬가지인데, 알고 하는 말이지?”

 

이번에 무표정이 깨진 것은 타가미 쪽이었다. 정작 위선을 거절한 쪽은 본인이면서, 저런 말이 올 줄은 몰랐던 걸까. 미간을 확 구기고 상자에서 손을 뗀 그가, 핏자국이 남은 상자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장갑을 끼고 있는 탓에 지문은 남지 않았지만, 선명한 손가락의 자국. 약간은 변색되어 검붉은 손자국은, 아마 상자에 물을 끼얹더라도 지워질 것 같지가 않았다.

 

내가 뭘?”

사실이 그렇잖아? 타가미는 에노키의 상냥함이 싫지만, 결국 그걸 혼자 가지고 싶은 거면서

네가 뭘 알아?”

눈에 다 보인다니까. 이쪽도

 

그래. 다 보이니까 기분 나쁜 것이다. 그 모순적인 욕심이, 이제까지 쌓아온 동료의 벽을 허물 정도로 끔찍하게 느껴져서

 

이봐

 

잠깐의 침묵 끝, 다시 견고한 무표정을 갖춘 타가미가 입을 열었다.

 

네가 못한다고 남이 하는 짓에 훼방 놓는 건 애 같다고 생각하지 않나?”

무슨 의미야?”

너도 똑같이 하고 싶은데, 못해서 기분 나쁜 거 아냐?”

 

말도 안 되는 소리. 사에키는 그렇게 반박하려다 갑자기 목구멍 안쪽에서 차오르는 감정에 입을 닫았다. 제가, 에노키에게 저렇게 대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나? 정말로? 타가미의 말은 폭력에 가까운 매도였다. 사에키는 필사적으로 그의 의견을 부정하려 했지만, 스스로의 목소리를 막은 감정은 끝없이 아픈 말을 내뱉고 있었다.

타가미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누구라도 그 다정함을 혼자 독차지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겠지. 하지만, 나도 그런가? 그러고 싶다고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건.

 

전에도 말한 적 있는 것 같지만

 

노을을 닮은 주황색 눈이 더 가까워진다. 제게 정면으로 부딪히는가 싶더니 슬쩍 비켜나가 스쳐지나가는 타가미는, 조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혼란스러운 사에키의 생각에 종지부를 찍어주었다.

 

나는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점이 제일 기분 나빠

 

그것이, 타가미가 사에키를 그리도 지독하게 싫어하는 이유.

아까 제가 입은 상처를 배로 돌려주었기 때문일까. 어깨가 다 낫지도 않았는데도 저 멀리 사라져가는 타가미의 표정은 개운하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