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마르세우스 레어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한가득 모여 있던 형형색색의 조각들이 산산이 흩어져 마르세우스의 전신에 스며들었다. 전사에게 쓰인 조각은 기억으로 재구성되고, 기억은 한 권의 책이 되어 저택의 서재에 보관된다. 새로 되찾은 과거를 회상하기 위해 마르세우스가 눈을 감았을 때, 로셀레는 새로 만들어진 금색 표지의 책을 펼쳐들었다. 3376, . 큼지막하게 표지에 적힌 글귀부터가 눈에 띄었다.

막시무스는 우리와는 다르게 인간 사회에 어울려 지낼 수 있는 수준의 자아의식과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준의 신체능력이 부여되어 있었다.

단어 하나 놓칠 새라 꼼꼼하게 읽어 내리던 시선이 이 한 문장에 단단히 박힌 채 좀처럼 떠날 줄 몰랐다. 비록 현재 성유계에 있는 전사들 중 한 명의 이름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 이름이 뇌리에서 선명히 떠오르고 있었다. 리즈 라파르쥬의 기억과 감상을 문서화한 책에서 가끔 눈에 띄던 네 글자였다. 막시무스. 회상과 기억의 정리정돈을 얼추 마친 마르세우스가 잠시 눈을 뜸과 동시에 로셀레가 몇 번인가 곱씹어보던 이름이 이제야 떨어져나갔다. 성유계의 정체된 정적 속에서 흩어진 이름의 뒷맛은 영 씁쓸했다.

 

저기, 마르세. 어떡하지.”

무엇을 말이지?”

그냥, 여러 가지로 전부.”

그것만으로는 대답하기 힘들겠군.”

 

기억을 찾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리즈가 기억이 거의 없었던 마르세우스를 대뜸 붙잡아 세웠던 이유. 이따금 흔들리는 눈빛으로 마르세우스를 바라봤던 이유. 리즈와 마르세우스를 탐색에 동행시킬 때 가끔씩 이름을 틀리게 부르던 이유. 이유, 이유, 이유! 그간 조각조각 흩어졌던 의문의 파편들이 새로운 테두리에 모여 하나의 실체를 만들어냈다. 이 순간에 느껴진 작은 현기증은 언제나처럼 몰려오던 피로와는 별개의, 좋게 봐줘도 유쾌하다고는 할 수 없을 기묘한 감각이었다.

두 번째 현기증은 의외로 빠르게 찾아왔다. 그건 이 책의 주인과는 연관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사람의 등장 덕분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기서 뭐 해?

이미 지난 이야기의, 그것도 동료에게 건넨 말이었음을 알면서도 고동치는 가슴을 막을 재간은 없었다. 한 손을 주머니에 꽂고 문설주에 기대며 웃는 리즈의 부드러운 태도를 마르세우스 본인은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했을 테다. 그리고 기억을 되찾은 지금 또한 마찬가지일 테다. 길지 않은 분량의 이야기가 끝났을 무렵, 책은 조용히 닫혔다. 로셀레의 검은 현기증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옮아간 뒤였다.

 

마르세. 있잖아, 아무래도 나 지금…….”

 

똑똑. . 묻어두었던 소리가 밖으로 나오기 일보 직전의 틈에 메마른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당장 터질 뻔했던 소리는 굳게 다물린 입술 사이에서 그대로 제 존재를 삭여야 했다.

빛바랜 금발과 짙은 색의 피부는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책에서 서술된 그 모습 그대로다. 흐트러짐을 찾아볼 수 없는 제복 차림에서 그의 성정을 엿볼 수 있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건실하면서도 앳된 얼굴은 얼마나 이른 나이에 이 세계에 왔는가를 가늠할 수 있는 근거 중 하나였다. ……리즈 라파르쥬. 방금 막 서재에 발을 들인 연대의 에이스는 황제와 소녀라는 드물지 않은 조합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누가 지시자를 찾고 있던데. 다른 용무 중이었다면 나중에 다시 올게.”

아냐. 방금 끝냈으니까, 금방 간다고 전해줬으면 좋겠어.”

하하하, 그래. 그럼 그렇게 하지.”

그대가 그 때의 금발이군.”

금발? 날 말하는 건가? 막시, ……마르세우스.”

 

한 호흡 늦게 정정한 이름에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튀어나온 손이 리즈의 손을 낚아챘다. 로셀레의 양손은 아직도 금색 표지의 책을 쥔 그대로였다. 그러니까, 리즈를 잡은 건 마르세우스의 장갑 낀 하얀 손이었다. 하얀 장갑과 검은 반장갑이라는 조합은 실로 기이했다. 그것도 좋은 방향으로.

 

잠깐이었지만, 이번에 되찾은 우리의 과거 속에 그대가 있었다.”

……내가 그쪽 기억에?”

그렇다.”

 

대답을 듣고 난 뒤에도 리즈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기색을 표했다. 그럴 만도 했다. 막시무스와 마르세우스는 서로 빼닮은 게 당연하긴 했어도 완벽히 동일인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언젠가 리즈가 마르세우스를 막시무스라고 불렀던 날, 마르세우스가 그렇게 단호히 못박은 적이 있기도 했다. 막시무스는 레지멘트에서 지냈지만 마르세우스는 레지멘트 기지와는 동떨어진 곳에서 활동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이 그의 기억에 등장할 수 있었을까. 마르세우스가 갖춘 기능에 대해 알지 못하는 리즈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였다. 그래, 확실히 의문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이 자리에선 고개를 끄덕여보일 수밖에 없었다.

 

, 그래. 그랬었나. 그것 참 신기한 일인데?”

 

당혹스러움이 묻어나는 눈치와는 다르게도 손은 여전히 붙잡힌 그대로다. 뿌리치려 마음먹는다면 언제든 뿌리칠 수 있었을 것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건 그에게 있어 어떤 의미일까. 로셀레는 이성이 내뱉으려고 하는 말을 본능이 삼켜 소화시키도록 방치했다.

 

마침 잘 됐군. 우리에게 잠시 시간을 내줄 수 있나?”

시간이라면 있긴 하지만, 무슨 일로?”

그대에게 흥미가 생겼다, 고 하면 대답이 되겠나? 우리가 본 그대의 모습에 대해 들려줄 겸 묻고 싶은 것도 있다.”

……그런 거라면 기꺼이.”

 

황제의 옅은 웃음은, 언젠가 그의 이름이 적힌 첫 번째 금색 책 중에서도 앞부분에 있던 완전한 아름다움이라는 구절에 걸맞게 요염한 향기가 풍겼다. 과연. 전성기 시절의 외모는 그 구절이 단순한 자아도취가 아니었음이 새삼스럽게 피부에 와 닿을 정도였다.

로셀레의 손가락이 마르세우스의 소맷부리를 잡아당겼다. 신장 차이는 둘째로 치더라도 소매통이 넓었던 만큼 쉽게 잡을 수 있었던 것에 로셀레는 디자이너를 향한 소리 없는 감사를 표했다.

 

뭐지?”

나도 같이 가도 괜찮겠지? 내가 들으면 안 될 얘기를 하러 가는 건 아니잖아.”

좋을 대로 해라.”

 

로셀레와 마르세우스의 눈동자는 동일한 색이다. 글쎄. 그렇다 해서 서로를 쳐다보는 이 순간의 예리한 시선에 동일한 뜻이 담겨있을 리는 없었다. 낮게 깔린 고양이상의 눈매와 반달을 그리는 눈매는 누구 먼저랄 것도 없이 담백한 흐름으로 서로를 시야에서 지웠다.

좌편의 황제, 우편의 소녀, 그리고 중앙의 에이스. 좌우에 각각 위치한 마르세우스와 로셀레는 포커페이스였다. 굳이 따지자면, 두 사람 사이에서 얼떨떨한 표정 그대로 끌려가는 리즈만이 유일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었다. 로비까지의 길이 이렇게까지 멀게 느껴질 날이 올 줄은 몰랐다……, 고 생각한 리즈의 입가에 소량의 쓴웃음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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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류아키☆륭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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