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안 / 노래의 왕자님 / 이치노세 토키야×나이토 코하쿠×진구지 렌
유독 이상한 아침이었다. 알람이 요란하게 울리는 자명종을 끄기 위해 내저은 손도 평소보다 배로 무거운 것만 같고, 이불을 분명히 덮고 있었는데도 목덜미는 차게 식은 습기로 축축하다. 요즘 날씨 같아서는 밤새 더웠을 리가 없는데, 코하쿠는 목 뒤를 여전히 무거운 손으로 몇 번 문질렀다.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은 차다. 창문을 열어 두고 자서 이런 건가? 그녀는 우선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수업에 가기 위해 준비를 하면서 몇 번을 주저앉아야 했는지. 평소라면 그냥 가기 싫다는 일념에 나오는 행동이겠지만, 여전히 무언가 이상하다. 첫 수업이 그리 끔찍한 강의도 아녔고 특별히 악몽을 꾼 것도 아니다. 같은 반 학우들과 싸우지도 않았고. 대체 뭐가 문제인지. 기숙사 방의 현관 앞에 주저앉은 채 그녀는 한참을 멍하니 어린아이 같은 생각을 곱씹었다. 살살 쓰리게 느껴지는 복통을 무시하며 바닥에서 일어났다. 수업만 듣고 오면 된다, 그러면 다시 기숙사에 돌아와 잠을 자던 하면 되겠지. 뺨을 몇 번 제 손으로 때리며 방에서 나섰다.
손바닥에는 그새 습기가 묻어 있었다. 정말이지 이상하다.
교실에 도착했을 즈음에는 머플러 하나쯤 챙기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이 된 뒤로 유독 바람이 서늘해 지고 있고. 복통은 추위에 자극받은 건지 더 쿡쿡 안쪽을 쑤신다. 아니, 교실에 이미 도착한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 때문에 더 아프게 느껴지는 걸지도. 복통이 어느새 머릿속으로 옮겨간 것만 같다.
“나이쨩, 좋은 아침.”
오늘도 귀엽다는 것이 요인 긴 칭찬을 던지며 렌이 씩 웃는다. 언제 가까이 다가온 거지, 생각하면서 그녀는 제 자리에 가방을 올려 두었다. 그 자리에서 옆으로 한 칸, 조금 떨어진 자리의 주인은 오지 않았다. 렌보다 늦다니, 별일이네. 그 정도로 생각을 갈무리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반에서, 정확히는 그 속에서 친하게 지내는 무리 중 가장 빠르게 도착하는 건 주로 토키야였다. 그다음으로 언제나 부지런하고 기운 넘치는 쇼가 도착했고 렌과 코하쿠는 느지막이, hr가 시작되기 조금 전에 들어오고는 했다.
그러고 보니 쇼도 안 보이네. 코하쿠는 빠르게 교실을 훑어보고는 여전히 그녀의 앞에 서 있는 렌에게 시선을 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여전히 그녀에게 그 여유로운 미소를 권하며 렌은 그 앞의 의자를 끌어와서 앉았다. 코하쿠는 마른 입술을 끌어올려 그와 비슷한 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입술의 피부가 갈라질 것만 같은 감촉이라 손을 들어 입을 슬쩍 가렸다. 렌이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혹시 어제 밤이라도 샌 거야?”
고개를 휙휙 젓자 그가 조금 더 미간을 찌푸렸다. 혀를 내어 입술을 핥아보았지만, 피가 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행이다, 하고 생각할 즈음 렌이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뭐하는 거야?”
“뭐하긴. 열이 있나 확인하는 것뿐이야. 나이쨩, 정말 푹 잔 거 맞아? 내가 보기엔-”
다시 고개를 젓자 그가 더 엄한 얼굴을 하며 이마에 짚은 손을 거뒀다.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의 안색을 뜯어보는 게 어물쩍 넘어가기엔 어려울 것 같이 보인다. 통증이 다시 따끔, 뱃속을 건드린다. 느껴본 적이 없는 통증이라 살짝 어깨를 움츠리자 렌은 혀를 쯧, 찼다. 어색하게 웃으며 슬쩍 얼굴을 살피자 평소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엄격히 굳은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본다.
변명이라도 하려 입을 벌리려는 찰나 밝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툭 그들을 불렀다.
“오, 코하쿠, 렌, 오늘 빨리 왔네? 어, 코하쿠는 안색이 왜 그래?”
맙소사. 학원장 선생님이 지금 갑자기 창문에서 뛰어들어도 아마 이것보다는 멀쩡한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다. 렌은 엄격한 표정 위에 약간의 짜증마저 느껴졌고 쇼는 그냥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코하쿠는 평소처럼 한숨을 쉬면 바닥이 꺼진다는 농담조차 건넬 수 없었다. 아까부터 내내 신경 쓰이던 복통의 탓도 있었고.
그래도 아직 가장 불편한 상황은 아닌데, 하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굴리고 있을 때였다. 길고 섬세한 손이 옆의 책상을 끌어당겨 똑바로 하는 모습에 절로 시선이 움직였다. 답답할 정도로 목까지 단추를 채운 셔츠에 붉은 넥타이. 그리고, 길게 뻗은 목의 선과 차갑게 찌르고 들어오는 것만 같은 시선. 절로 눈을 피했다. 그래, 이정도면 굉장히 불편한 상황이네.
머리를 책상에 박고 잠든 척하고 싶은 충동을 무시하며 그녀는 손을 들어 인사했다. 안녕 쇼, 안녕 이치노세 씨. 렌이 한숨 쉬고 싶은 걸 참는 표정으로 시선을 코하쿠에게 고정했다. 여전히.
“농담 아니야, 어디 아픈 거지? 나이쨩. 양호실에 가는 게 좋지 않을까? 오전 수업이라도 빠지고 쉬는 쪽이 나을 거야.”
부드럽게 눈매를 휘며 다시 손을 뻗어 어깨를 톡톡 두드린다. 유독 별칭을 부르는 목소리가 다정하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어느 정도 맞는 걸지도. 쇼가 짓는 표정은 어쩐지 코하쿠 본인의 언니가 훈계할 때 짓는 표정과 닮아 있었다. 렌이 대신 달래고 있어서 참는 것 같았지만.
“참을 만한데.”
“지금 아픈 걸 참고 있다는 이야기네, 그거.”
자리에 앉은 토키야가 가방을 정리하다가는 그녀의 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이번엔 눈을 피하지 못해서 왜? 하고 물어보니 렌의 말을 들으라는 듯 역시나 엄격한 표정을 굳힌다. 코하쿠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결국 참지 못했다.
“알았어. 다녀올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살짝 비틀거리자 렌이 빠르게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이제는 복통이 참기 힘들 지경이라 코하쿠는 입술을 깨물며 고맙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아침의 축축함은 식은땀인가, 뒤늦게 깨닫는다.
+ + +
양호실까지 반쯤은 렌에게 안겨서 갔다. 그것도 업어주겠다는 걸 한사코 거절한 결과였지만. 이 작은 학원에서 그런 모습마저 보인다면 지금도 그다지 좋지 않은 본인의 평판이 어떻게 돌변할지 어떻게 알겠나. 특별히 예쁘지도 특출난 것도 아닌 나이토 코하쿠가 유독 에스클래스의 인기인들과 가깝게 지내고 있다. 그것도 여성에게 훌륭한 매너로 인기가 좋은 렌이 양호실까지 업어줬다는 이야기가 퍼진다면, 골치 아프다.
안겨서 왔다는 이야기도 그다지 좋지는 않은데. 그녀는 작게 한숨 쉬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나쁜 소문에 상처받거나, 그런 것이 걱정인 것은 아녔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렌은 좋은 친구이지만, 잘못 오해받는 다면 나란히 학원에서 내쫓길 가능성도 있으니.
양호 선생님은 열을 재고는 몇 번 질문을 던지더니 어디선가 꺼낸 약을 손에 쥐여줬다.
“장염이야. 금방은 안 나을 거다. 며칠은 식사하는 거 조심하고, 약은 처방전을 써주는 게 낫겠다. 오늘은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나을 때까지만 여기서 쉬고 가라.”
뒤에서 느껴지는 렌의 눈빛이 꽤 매섭다.
처음부터 좀 졸린 표정이던 선생님은 금방 양호실에서 사라졌다. 코하쿠에게 처방전을 쥐여준 뒤 양호실에 놓인 간이침대를 향해 손짓하고는 금방 나가버린 게 다였다. 렌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살폈다. 좋은 말로도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기숙사로 돌아갈 힘은 없었고, 렌이 바라는 것처럼 업혀가는 것도 사양이었으므로, 그녀는 결국 간이침대를 선택했다. 배 속을 쿡쿡 쑤시는 통증은 여전해서 누운 채 몸을 조금 웅크렸다.
“좀 어때?”
고개를 작게 젓자 그는 픽, 웃음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침대의 곁에 놓여있던 작은 의자를 끌어와 앉는 걸 보며 코하쿠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저기 렌, 수업 들으러 가야 하지 않아?
렌은 느릿하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 주저하듯.
그는 대답보다는 의자를 좀 더 가까이 끌어와 그녀의 곁에 붙어 앉았다. 모범생인 그녀와는 달리 렌은 수업을 꽤 빼먹었다. 물론 날이 좀 더 더웠을 적의 이야기이긴 했으나. 근래 들어서는 성실하게 듣더니? 수업 중에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면 렌과 눈이 맞아본 적이 꽤나 많았다. 음, 수업을 열심히 듣는 건 아닌가. 양호실에도 차가운 바람이 감돈다. 역시나 창문이 열려 있다. 가을이란 걸 부정할 수 없게 만드네. 코하쿠는 침대에 놓인 얇은 담요를 힘없는 손으로 끌어당겨 몸 위에 덮었다.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던 렌은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담요를 제대로 펼쳐 코하쿠의 몸에 덮어주었다. 자신보다는 조금 따뜻한 손이 툭툭, 어깨를 다시 두드린다. 걱정스러운 표정이 지워지지 않은 얼굴에서 눈이 다시 슬쩍 웃어준다. 정말 한결같은 호의이다. 렌은 그녀에게 가족이라도, 아니 무언가가 되어주고 싶어했다. 여동생이라도 삼고 싶은 건지. 그녀는 유독 그의 눈에서 온기를 느꼈다.
어쩐지 그 감각이 간지러워 얄팍한 베개에 볼을 비볐다. 단정하지 못한 앞머리가 시야를 금방 가린다. 뭐하는 거야 나이쨩, 하면서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따뜻한 손이 앞머리를 옆으로 넘겨준다. 따뜻한 것도 아니라 조금 뜨거운 걸까, 식은땀 때문인지 볼에 들러붙은 잔 머리카락을 치워주는 손가락이 피부를 스치며 온기를 남긴다.
무심코 손을 뻗어 그가 손을 거두는 바로 그 앞에 놓아두었다. 렌은 미미하게 웃음소리를 내며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니까, 이 행동을 다른 말로 바꾸면 이렇게 변하지 않을까.
“어서 자, 여기 있을 거니까.”
아플 때 혼자면 속상하잖아. 말로 굳이 하지 않은 호의가 온기로 대신 전해진다. 코하쿠는 대답을 혀에 올렸다가는, 입을 다물었다. 자꾸만 표정이 어그러지는 것만 같아서. 고맙다는 말 대신 손을 한 번 쥐었다.
그녀는 고맙다는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계속 그 온기 위에 다른 사람을, 다른 목소리를 덧그리고 있었단 걸 부정할 만큼 정신이 아득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조금 더 섬세하고, 뼈대가 도드라지는 하얀 손이나. 조금 더 날렵한 눈매의 소년을 말이다.
꿈도 크지. 코하쿠는 저 자신을 비웃을 수밖에 없었다. 정말 말 그대로 꿈 같은 이야기를 상상했구나. 그럴 시간에 잠이나 청하겠다. 그녀의 얼굴을 살피는 시선은 여전하다. 눈을 피하고 만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터이다. 걷잡을 수 없는 상상과 바람이 뱃속 깊은 곳에서 도사리는 게 느껴지는 것만 같다. 작은 짐승이라도 되는 것처럼 속을 할퀴고 올라오는 통증.
익숙하다. 입술의 끄트머리만 올려 비죽 미소 지었다. 그에 대한 답을 혀에 올리려 몇 번 시도한 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아쉬움도, 원망도, 어떤 일그러진 것도 아니었다.
“나은 뒤에 제대로 갚을게. 약속.”
“이런, 영광이네. 그러면 나는 사랑스러운 아가씨에게 어떤 부탁을 할지 기대해야겠네.”
능청을 떠는 렌의 얼굴은 한숨이 나오도록 익숙하다. 그대로 한숨이 나오도록 둔 채 눈을 감았다. 약의 효과가 드디어 도는지 식은땀은 멈췄다. 감은 눈꺼풀 아래의 고요는 그나마 평온하다.
그럼에도 느끼는 이 통증은 대체 어디서 오는지. 그녀는 통 알 수 없었다.
+ + +
나이토 양의 파트너이자 작곡가 코스의 학생 나나미 하루카는 유독 토키야를 어려워했다. 놀라운 일도 아니다. 나이토 양은 부정할지 모르지만 학원의 사람들은 그가 어렵다고 생각했으니까. 처음엔 유명 아이돌 하야토와 똑같은 얼굴이면서 사교성이 없고 냉정한 부분을, 그리고 지금은 현역 아이돌이면서 모두를 ‘속이고’ 아이돌 양성 학원에 들어온 부분을.
어떤 이들은 그걸 배신감으로 받아들였고 어떤 이들은 기회로 생각했다. 이미 성공한 아이돌과 연을 잇는다는 건 나름의 커넥션이니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던 사람들은 금방 그의 단호한 태도에 돌아섰다. 그리고 말한다. 토키야는 신경질적이며 무서운 사람이라고.
완전히 아니라고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가 또래의 학생들에 비해 예민하고 꼼꼼한 건 확실한 사실이었으며 타인을 위해 그것을 굽힐 마음도 크지 않았다. 애초에 저를 이용하려고 드는 사람이 대다수인 걸, 굳이 토키야가 배려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자신을 두려워하는 하루카가 자신에게 다가와 쭈뼛쭈볏 말을 꺼낼 때만 해도 토키야는 무슨 부탁이라 해도 거절할 생각이었다. 무엇일지는 몰라도 그와는 그다지 상관이 없는 이야기일 테니까.
“저, 이치노세 군, 코하쿠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나요?
“나이토 양이라면 몸이 안 좋아서 보건실로 갔습니다만. 아침에 몸상태가 안 좋아 보였습니다.”
“아…”
그녀는 고개를 푹 숙였다. 엷은 색의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지며 하루카의 표정을 가린다. 사람을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는 그녀로서는 당연한 반응이다. 토키야는 그녀가 말을 하길 기다렸다. 여전히 입을 달싹이면서 뭔가 말하려 하다가는, 품에 안은 파일을 만지작거린다.
“저, 전해줘야 할 게 있어서… 혹시 어디에 있는지… 누가 알고 있는 지라도 말해줄 수 있나요?”
그러면서도 시계를 흘끔거리는 게 시간이 부족한 모양이다. 분명히 작곡가 코스의 학생들은 담임 선생님에게 받는 개인 교습이라는 게 있었지. 그는 선선히 손을 내밀었다.
“괜찮다면 대신 전달해드리겠습니다. 그녀에게는 안 그래도 볼일이 있습니다.”
소녀의 표정이 금방 활짝 펴지며 그에게 두꺼운 파일을 쥐여준다. 흘깃 보았을 때 악보의 오선지와 이런저런 메모가 적힌 걸 보았다. 저를 경쟁 상대 중 하나라고 생각하긴 하는 걸까? 생각하면서도 그는 내용물이 안 보이도록 파일을 잘 덮어두었다.
사실 나이토 양에게 볼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프다 그랬으니 얼굴을 보러 가야겠단 생각을 했을 뿐. 곤란해 보이는 학우를 돕겠다고 자청하게 된 것도 그저, 그녀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에서 한 것이었다. 전부 토키야 치고 굉장히 유한 행동이었다. 혹은 과한 참견이거나. 하지만 코하쿠였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이 반대였다면, 말이지.
그야 당연하다. 이치노세 토키야는 상냥한 나이토 코하쿠가 아니다.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그를 향해 뻗은 듯한 손을 눈여겨보았다. 작고 끝이 둥그런 조개껍데기들만 같은 손톱이 오밀조밀, 다섯 개. 그의 손과는 크기도 모양새도 확연히 다르다. 바닷가에 밀려 올라온 조개껍데기의 색, 엷은 분홍빛. 그는 억지로 그것에서 눈길을 떼었다. 무릎에 올려 두었던 파일을 어찌할까 고민하는 척 시선을 돌렸다.
단순히 그녀가 아파서 온 게 아니다. 토키야는 코하쿠에게 여러 개의 빚을 졌고 그것이 그를 잡아끌었다. 그는 자기 이상행동에 그런 이유를 붙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한여름, 몸살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던 그를 잡아끈 것도 코하쿠였고 간호해주며 곁을 지켜준 것도 그였다. 그렇다, 빚을 갚을 마음으로 온 것뿐이다.
잠든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려 보았다. 몇 달 전, 열에 달뜬 의식 속에서 보았던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작고 조금은 둥근 얼굴, 눈가에 선명히 박힌 눈물점. 어린 시절, 누군가, 아마 같은 학급의 누군가가 말해준 눈물점이 있는 사람은 쉽게 운다는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거짓말. 나이토 코하쿠는 그 누구의 앞에서도 울지 않았다.
조금 용기를 내어-용기인가, 충동인가-눈가의 얇은 피부를 손끝으로 간질여보았다. 창백하게 솟은 광대 위를 쓱 훑었다. 토키야가 여태 보아온 것처럼 아름답거나 눈이 아프도록 화려한 생김새를 가진 건 아니었지만, 잠든 얼굴만큼은 두 손으로 쥐어보고 싶었다.
그래도 아이돌 지망생치고 퍽이나 평범한 얼굴인데. 꽤 냉랭한 생각을 주워섬기면서도 손은 그 작은 얼굴을 떠나질 못한다.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을 떼어주자 간지러운지 부드러운 능선의 눈썹이 슬쩍 미간으로 모인다.
잠시 숨을 멈추며 어깨를 긴장시킨 것과는 달리, 그녀가 눈을 뜨고 저를 몽롱하게 쳐다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설명하려면 역시 귀찮아질 테다. ...아니, 이런 상황은 설명하지 않아도 명료하다. 코하쿠는 쓸데없는 오해를 싫어했고, 쉬이 하지도 않았다. 그런 오해는, 토키야가 코하쿠의 가족일 때에나 풀 수 있다. 혹은 그녀의 연인일 때에.
이를 악물었다. 이치노세 토키야는 진구지 가의 도련님처럼 여자에게 쉽게 굴지 않았고 타인과는 명백한 선을 그어두기로 유명했다. 저를 짝사랑하는 게 분명한 사람에게 이렇게 쉽게 구는 것도. 하. 하고는 웃음 같지도 않은 소리가 튀어나온다. 소녀의 얼굴을 간질이는 손길이 이제야 멈춘다.
구차하게 변명하고 싶었다. 그저 호의라고 생각했고, 여전히 그리 생각하고 있다며. 그녀가 저를 볼 때 짓는 표정은 동경을 담은 것뿐이라며, 가끔 일그러지는 미소는 그 속의 질투가 아닌가. 그녀의 연정을 마음속으로 변호하게 된 이 현실은 정말이지, 구차하다.
그녀가 빠르게 포기하는 쪽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며 토키야는 저 자신을 설득했던 적도 있었다. 분명 처음에는 그랬을 텐데.
무심한 태도와 잔잔한 다정함은 그에게 무엇을 한 걸까? 때로 위태로운 여자는 저를 향해 때때로 눈부시게 웃었다. 그래, 오직 저만을 위해서.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인정하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나, 잇치, 하고 길게 말끝을 늘이며 그를 볼 시선이 벌써부터 따갑다. 눈앞에 잠들어 있는 소녀는 어지간히 지친 듯 그 흔한 잠꼬대 하나 하지 않는다.
토키야를 잇치라고 고집스럽게 부르는 친우의 눈빛도 꽤 위협적이다. 언제나 주변을 살피는 점은 소녀와 똑같으면서도 소녀의 얇은 뒷모습을 절로 좇는 표정이나, 그녀에게 말할 때마다 입술을 적시며 웃는 모양새나, 토키야를 향해 가끔은 일부러 지어 보이는 눈웃음이나. 코하쿠의 첫사랑을 눈치채는 것보다는 오래 걸렸지만, 대답을 도출해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렌은 코하쿠를 어느 선 이상으로 좋아하고 있다. 연애금지령, 그놈의 연애금지령은 어디에 갖다 버리고 왔는지 모를 영문이다. 연애감정 금지령이 아니니 이 사단이 된 걸까? 의문을 품어보지만, 저가 샤이닝 사오토메가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튀어나오는 의문과 질문을 삼킨다, 분명 참는 것에 익숙한 그에게는 그게 어쩐지 낯설다. 코하쿠는 그에게는 의문투성이이다. 허나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닌. 그녀를 보며 몇 개의 의문을 떠올리는가. 생각을 곱씹는다.
당신은 왜 저에게 사랑을 느끼나요?
아니면.
왜 이 자리에 저가 찾아왔는지. 어찌하여 그는 그녀의 마음을 알고도 밀어내지 못했는지. 어째서, 꿈에 그대가 나타나는지.
혹은.
이것은 사랑인가요.
여전히 그를 향해 뻗은 손을 잡았다. 그는 이 온도를 안다. 애정의 온도, 어느새 그에게까지 옮아버린 온도. 익숙할 수 없는 그것을 어찌해야 할지 그는 잘 알면서 쉬이 손을 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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