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한다는 것.

그 사람의 근처에서 시선이 맴도는 것.

내쉬는 날숨 하나까지도 집요하게 좆는 끈질김을 들킬까 문득 두려워져 애써 평범한 태도를 가장하려 해도,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리에 있으면 목각 인형처럼 뻣뻣하고 어색해지는 것. 평범이란 게 대체 무엇이었는 지 자신은 원래 어땠었는지 잊고 이제까지 줄곧 알아왔던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 그리하여 그 사람의 존재 하나로 세상이 낯설어지는 것.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 사람의 말에 웃고, 그렇게 그 사람을 점점 닮아 가는 것. 어느 날 그 끈질김이 누군가의 눈에 띄어, 너 너무 좋아하는 티 내는 것 아니냐, 농담처럼 가볍게 놀려졌을 적에 화산처럼 용솟음치는 심장을 얼음으로 식혀 모두와 같은 온도로 웃으며, 그 사람의 옆얼굴이 아무 꿍꿍이 없이 웃고 있는 것을 곁눈으로 훔쳐보고 안도하는 동시에 자조하는 것. 그럼에도 아름다워서 잔인한 그 사람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그렇기에 멈출 수 없는 것.

 

엔노시타 치카라는 사랑을 하고 있다.

 

 

 

상사

w.

 

 

 

낡아서 덜겅거리는 창문을 열고 정신이 번쩍 들도록 차가운 겨울 바람을 들여 텁텁하게 고인 실내 공기를 환기시킨다. 부실 구석의 오래 묵은 먼지를 닦고 마른 걸레로 물기를 훔친다. 누군가는 잡일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이런 종류의 일들을 엔노시타는 싫어하지 않았다. 아무리 주기적인 대청소로 뒤엎는대도 남자고등학생 열댓명이 사용하는 부실의 구석구석에는 금새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더러움이 쌓이고 고이기 쉬웠다. 그런 것은 결국 눈에 밟히는 사람이 손을 대기 마련인 법이다. 금새 이리저리로 튀어 저지레하기 일쑤인 동급생들이며 후배들을 데려다가 일껏 고생하는 것보다 슥슥 혼자 해치워버리고 역시 치카라야!’ 하는 진심 어린 감탄에 진심이 담기지 않은 구박을 돌려주는 쪽이 편했다. 이것이 선의의 발로라기보다 자의식에 가까운 무언가 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정도는 자각하고 있었으나 어쨌든 크게 나쁜 일은 아니었으므로 엔노시타는 부실의 관리를 성실하게 계속했다. 수험이 급속히 가까워져 부실에서 오래 시간을 보내지 않게 된 선배들은 가끔씩 마주치면 그런 그에게 미안함과 대견함이 정확히 반씩 섞인 미소로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그러면 화석처럼 굳은 심장이, 덜컹, 하고,

 

? 왜 혼자야?”

 

소스라치게 놀라 뒤돌아보자 반갑게 말을 걸어오던 소녀가 주춤 멈춰 섰다. 놀라 동그랗게 뜨인 까만 눈동자 위로 낯선 사람을 보듯 잔뜩 긴장한 그 자신의 인영이 어름어름 비쳤다. 방금 들려온 소음이 회상 속의 심장 소리가 아니라 등 뒤에서 소꿉친구가 부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엔노시타가 천천히 곤두세웠던 어깨의 힘을 풀며 토끼처럼 놀란 눈에 시선을 맞췄다. 그것만으로 금새 미심쩍던 기미일랑 티끌처럼 지워버리고 마주 웃어주는 여자아이에게 한 발 늦게 대답을 돌려주자 표정이 다양한 얼굴이 금새 찌푸려졌다.

 

정리할 게 좀 남아서.”

뭐야, 그걸 왜 네가 혼자 해? 부장이잖아.”

누가 하면 어때. 혼자 하는 게 빨리 끝나고.”

그거 너 안 좋은 버릇이야. 그래도 계속 같이 해버릇해야지 계속 혼자 다 떠맡으면 어떡해?”

말이 쉽지, 네가 타나카랑 니시노야 감당해 봐라.”

 

한탄하는 내용과 달리 웃음기마저 섞인 어조는 여전히 나즈막했다. 눙치듯이 눈꼬리를 떨어트리며 웃는 얼굴에 한 발짝 더 다가서려는 찰나, 그러고 보니 무슨 일이야, 하며 물음의 끝이 되려 소녀를 향했다. 말을 돌리자는 속셈인 줄 모르지 않지만 대답하고 마는 것은 저 웃음 앞에서는 아무래도 약해지는 까닭이다.

 

한 집 사이를 두고 태어나 십여년이 넘도록 이리저리 부대끼며 함께 자라온 남자아이는 어릴 적부터 곤란하거나 애매한 상황에서는 자주 조느냐고 오해받는 눈꺼풀을 가늘게 뜨고 조용한 웃음으로 흘려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천성이 정반대로 뭐든지 확실하게 매듭을 짓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는 그녀로서는 그렇게 은근슬쩍 손해보는 역을 떠맡는 버릇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당하다는 어휘를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혼자 슬쩍 물러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만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반 발짝이라도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 사람은 다시 모두와 맞추기 위해서는 혼자 종종걸음을 쳐야 하기 때문이다. 반 발짝 밖에 안 되기 때문에 아무의 눈에도 그게 모두가 멈추고 그 애를 기다려줄만한 큰 일로 보이지 않게 되어서, 결국은 멀리멀리 혼자 남겨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쪽이든 그건 그 애가 혼자 떠안을 짐이 될 것이기 때문에, 후지노 아키는 그것이 싫었다. 그런 대가 없는 상냥함의 끝에 돌아오는 것이 그렇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채 혼자 속으로 삭여야만 하는 짐이라고 한다면 대단히 옳지 않은 일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 아이가 그런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대단치 않았으므로(물론 본인이 바뀌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겠으나 상냥한 그 소년은 이 문제에 관해서만은 아무리 윽박지르고 화를 내고 울어 봐도 난처한 웃음만 흘릴 뿐 변하는 일이 없었다), 후지노는 어쨌든 친구를 혼자 놔두지 않기로 했다. 떠맡겨진 교실 청소는 함께 해치우고, 부족해서 받지 못한 간식은 제 몫을 반씩 나눠먹었다. 고작 쿠키 한 개를 둘로 나누는 것일지언정 그것은 어린 후지노에게 어긋난 세상의 이치를 바로잡는 중요한 일로 여겨졌다. 치카라가 떠안으면 그만큼 내가 나눠 들면 되지. 어린아이의 순진한 마음과 가는 팔로 소년 한 사람 분의 마음을 너끈히 지탱해내던 어린 시절을 지나, 조금 더 능숙하게 성장한 뒤에도 그의 이런 오래 묵은 답답한 점은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았다.

 

이거 겨울방학 체육관 사용 시간표. 세키구치 선생님이 운동부에 한 번씩 다 확인 받고 교무실로 가져오라고 하셔서. 너희가 마지막이야.”

, 고마워. , 괜찮을 것 같다.”

-케이. 여기 사안해주세요-.”

. 바로 집에 갈 거지? 내가 교무실에 가져다 드리고 올게. 같이 가자.”

, 하지만 내 일이니까.”

이제 겨울이고 어두운데 교무실까지 왔다갔다 하려면 춥잖아. 금방 다녀올게.”

 

난로 켜고 따뜻하게 있어. 말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는다는 듯 낡아빠진 스토브의 스위치를 돌리고 재빨리 부실을 빠져나가는 몸짓이 단호해 따라 나설 틈이 없었다. 얼떨결에 혼자 남겨진 부실에서 그녀가 입을 비죽였다. 역시 다른 사람을 위해 맞춰주는, 상냥한, 그대로의 치카라다. 아무도 보일 사람 없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뺨은 낡은 스토브의 열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지켜주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한심하고 답답했던 면이 언젠가부터, 의지하고 싶어지는 단단함으로 바뀌어 보이게 된 것은후지노가 잔뜩 달아오른 얼굴을 머플러 속에 푹 묻었다. 천 번도 더 넘게 보았을 미소가 좋아하게 된 뒤로는 한 번 한 번이 심장이 멎을 듯한 큰 일이었다.

 

좁은 부실은 금새 훈훈해졌다. 손을 내밀어 불을 쬐이자 차갑게 식었던 손끝이 거짓말처럼 따끈해졌다. 지금쯤 대신 춥고 어두운 복도를 걷고 있을 소년은 가까운 이들에게 예사로 다정했다. 누구에게도 그렇게 대하는 그 애의 천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장 가까운 소꿉친구의 자리에서 몇 번이고 그런 상냥함을 겪다 보면 마음이 속절없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궂은 일을 대신해주고, 당연하다는 듯이 곁을 맡기는, 그런 모습을 보다 보면, 그 어깨의 짐을 덜어주고 싶고, 자신만을 봐줬으면 싶어져서.

 

낯부끄러운 상상에 머플러가 풀어질 듯한 기세로 도리질을 치자 머리가 윙윙 울렸다. , 안돼. 요새는 조금만 가만히 있어도 자석이라도 붙은 양 자꾸만 생각이 그쪽으로 쏠렸다. 잠시 후에 그 애가 교무실에서 돌아오면 함께 집에 갈 텐데 계속 이래서야 눈도 마주치지 못할 것이 뻔했다. 뭔가 생각을 바꿀 것을 찾아 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던 후지노의 눈에 아직 조금 어질러진 선반 위가 보였다. 부실 청소를 거의 마쳐가는 것 같았지만 본인의 짐이 놓인 선반 위는 돌아가기 직전에 정리하려고 나중으로 미뤄둔 모양이었다. 남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겠지만. 어차피 피차 가방 속에 들어갈 물품이래야 교과서 아니면 연습복이나 배구화 정도밖에 없을 것이었고, 그 정도를 대신 만지거나 정리해준다고 이제 와서 굳이 저어할 사이가 아니었다. 돌아오면 바로 집에 갈 수 있도록 대신 청소를 끝마쳐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소매가 돌돌 말린 채 아무렇게나 놓여져 있는 져지 상의를 집어 구겨진 소매를 빼내고 공중에 몇 번쯤 탁탁 털었다. 어느정도 주름이 가신 옷가지를 개어놓고 있자니 그 애의 옷을 정리해주고 있는 이 상황이 조금은 여자친구같기도 하다는 달콤한 생각이 스멀스멀 어디서부터인지 떠올라 금새 머리를 가득 채웠다. 진짜로 미쳤나 보다.

 

낯익은 가방 안을 휘저어 옷가지를 넣어둘 자리를 만드는 손끝에 생경한 진동이 느껴졌다. 들여다보자 낯익은 휴대전화의 액정이 가방 밑바닥에서 반짝반짝 빛을 내며 소리없이 울리고 있었다. 깜빡 놓고 간 모양인 휴대전화를 어떻게 하면 좋을 지 당황하던 때에, 발신인 란의 어머니를 또렷하게 띄우던 액정이 조용히 부재중 전화 표시로 바뀌었다. 휴우. 죄 지은 것도 없는데 괜히 긴 한숨을 내쉬려던 찰나, 곧바로 빨갛고 파란 불이 들어온 액정은 다시 요란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받지 않을 전화 소리가 계속 울리자 왜인지 모를 긴박감과 조급함이 부실을 메우는 듯 했다. , 모르겠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저 아키예요. 치카라가 지금 잠시 교무실을 가서요.”

 

바로 옆집의 이웃사촌인 까닭에 어릴 때부터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놀러가곤 해서 귀찮게 해 드렸던 아주머니의 친숙한 목소리가 전화 너머에서 반색을 하며 인사를 건넸다. 어머, 아키도 이렇게 늦게까지 부활동을 하니? 날도 어두운데 여자애가 위험하게. 끝도 없이 이어지는 따스한 핀잔을 늘어놓던 아주머니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전화 말미에 용건을 덧붙였다. 치카라에게 집에 올 때 두부 좀 한 모만 사다 달라고 전해 줄래?

 

통화를 마친 휴대전화를 따끈따끈해진 귓볼에서 내려놓던 후지노가 풋 웃었다. 배경화면으로 해 놓은 남자배구부의 단체 사진이 금방이라도 액정 밖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그 박력의 80% 쯤은 가장 앞줄에서 한껏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눈을 부라리고 있는 타나카와 니시노야에게서 나오는 것일 터였지만,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러운 시선이 가 닿는 것은 그 두 사람의 가운데에 껴서 한껏 질린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단정한 소년의 얼굴이었다. 조그만 액정 속 단체사진에서 눈코입이나 겨우 판별되는 크기일지라도 이상하게 애틋하고 그저 좋아보이기만 하는 것은 어째서인지 몰랐다. 조그맣게 붙박힌 얼굴을 꼼질꼼질 만졌다. 예쁘다, 치카라.

 

조금만 더 큰 크기로 보고 싶은데. 두 손가락을 대고 확대 모션을 취해 보려 했지만 바탕화면 안에서 확대가 될 리 없었다. 망설이는 시선이 바탕화면에 가지런히 놓인 몇 개인가의 아이콘 사이로 한참을 헤엄쳤다. 사진첩 안의 원본은 소년의 얼굴을 마음껏 큰 크기로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과 남의 휴대전화 안을 마음대로 들여다 봐서는 안 된다는 양심의 대격돌이었다. 몇 번이고 부실 문과 휴대폰 화면 사이를 오가던 시선 끝이 주저주저 아이콘 위로 움직였다.

 

남자 고등학생 답게 단촐한 사진첩은 폴더가 몇 가지 없었다. 카메라롤, 경기 사진 등 평범한 이름의 폴더 두어개를 거쳐 맨 아래, 달리 지칭할 이름이 없다는 듯 온점 하나만 달린 폴더의 옆에 바탕화면에서 보았던 단체사진의 썸네일이 떠 있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폴더의 이름을 클릭하자 예상과 달리 폴더에 저장된 사진은 단 두 장 뿐이었다. 바탕화면으로 해 두었던 배구부의 단체 사진 옆으로 나란히, 그 사진에서 확대해 따로 잘라낸 듯한 확대 사진 한 장만이 저장되어 있었다. 무엇에 홀린 듯이 두 번째 사진을 누르자 태양처럼 찬란하게 웃는 얼굴이 화면에 가득찼다. 기묘하게 감촉이 느껴지지 않는 손끝이 매끄러운 액정 속 소년의 미소를 쓰다듬었다. 사와무라, 다이치.

 

덜컹.

 

얼어붙었던 고개가 생각보다도 먼저 돌아가 문간에 선 소년을 향했다. 열린 문 앞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엔노시타는 제 손에 들린 휴대전화 화면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몰래 숨겨놓고 혼자 내내 다시 보고 싶었던 미소가 가득 들어찬, 그녀의 손에 들린 액정을.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충격 속으로 무언가 다른 감정이 아주 서서히 퍼져 나갔다. 그것이 절망이었다고, 마찬가지로 굳어 있던 그녀는 나중에야 알아챌 수 있었다.

 

봤구나.”

, 이건, 아주머니가 전화하셔서받았다가. 미안, 나는.”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고 쏟아낸 말들 어느 것도 그에게는 가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어떻게 보았는 지 따위는 이미 들켰다는 충격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일이었다. 허공을 떠돌던 시선이 차츰 형태를 갖추고 휴대전화를 손에 쥔 채 굳어 있는 그녀를 향했다.

그녀는 평생 그 눈을 잊지 못할 것이었다. 절망과 자기혐오와 수치와 애정이 한데 뒤섞인, 하지만 묘하게 올곧은 눈으로 그는 말했다.

 

다이치 씨를 좋아해.”

치카라.”

 

망연하게 그의 이름을 부른 목소리가 자기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방금 전 단단한 목소리에 실려 들려온 이름이 도저히 그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듯이. 두 개의 이름은 현실감을 잃고 딱딱하게 굳어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혹은 아예 중력을 잃고 가볍게 깃털처럼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꺼내고 싶었던 모든 말도, 꺼내야 할 모든 말도 그대로 잃어버린 듯 한 혀마저 굳어버려 침묵을 지키자 엔노시타가 단단하게 굳어 있던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애써 웃으려는 입꼬리가 볼썽사납게 실룩였다.

 

역시 싫지, 이런 거. 이상하고.역겹지.”

 

남자가 남자를, 그것도 내가 다이치 씨를 좋아한다는 게. 말이 안 되지. 아무렇지 않은 듯 평범하게 말하려 했던 듯한 어조가 사정 없이 떨렸다. 시선을 돌리는 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뚫어지게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얼굴이 참담했다. 세상에서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사람의 생전 처음 보는 비통함이 주박이라도 된 양, 후지노 역시 거기에서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가슴 속에서 엉망진창으로 날뛰는 마음 하나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나는, 내가 너를 좋아해서, 그래서.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좋아하는 마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까이상하고 변태같아도 나 혼자서만 좋아하면, 되는 거잖아. 그럼, 그러면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아무도 기분 나쁘지 않으니까. 그냥 나 혼자서만.“

 

감정이 격해진 나머지 말끝이 흐려져 소년은 한껏 어깨를 움츠렸다. 몰래 찍거나 하다못해 단 둘만의 사진도 아닌 단체 사진의 일부. 다만 그 정도를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지켜오던 마음마저 과분한 짐으로 여기고 스스로 떠안아, 제발 혼자서만이라도 계속하게 해달라고 비는 울음에 그녀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사실은 좋아했다든가, 원했다든가, 그런 말 한 마디를 차마 저 울음 위에 더할 수가 없어서. 아무것도 담지 못하고 정처없이 헤매이던 시선이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소년을 향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절망에 가득한 모습이 낯설기 짝이 없었으나 그럼에도 누구인지 모를 수 없었다. 좋아하는 마음마저 감히 욕심부리지 못하고 누군가를 슬프게 하느니 혼자 전부 삭여버리려는 상냥한 아이. 그녀가 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던, 어떻게라도 지탱해주고 싶었던 아이의 모습 그대로였다.

 

이런 네가, 나는 너무도 좋아서.

좋아서 어쩔 수가 없어서.

 

그녀는 발뒤꿈치를 들어 당장이라도 부서질 듯한 표정을 한 소년을 끌어안았다. 단단히 감싸안은 팔 아래로 뻣뻣한 저항이 느껴졌다. , 하는 긁힌 듯한 목소리가 새어나와 이어진 몸을 울린다. 이런 걸로 너를 싫어하게 되지 않아. 거짓은 아니지만 온전히 진실만도 아닌 말을 들려주자 잔뜩 굳어 있던 어깨가 놀란 듯 흠칫 떨리고는 조금 잠잠해졌다. 그것을 껴안은 손에 힘을 주어, 당장이라도 목매일 것 같은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후지노는 말했다.

 

치카라, 1학년 여름방학, 한 번 도망쳤던 네가 부로 돌아갔을 때. 사와무라 선배가 가장 처음 뭐라고 했었는 지 기억해?”

 

엔노시타는 물론 그것을 기억했다. 꿈에라도 잊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엔노시타, 하고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었던 그 사람의 목소리, 그 안에 스며들어 있던 안도의 기색, 그 다음 말과의 간격에 조금 두었던 공백의 거리와 그 너머로 들려오던 여름의 기척까지도 올올이, 마음 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

 

화내거나 꾸짖기 전에 가장 먼저 이름을 불러주었던 선배가, 네가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말해줬던 사람이 너를 싫어하게 될 리 없잖아. 네 마음을 그렇게 내팽개칠 리 없어.”

 

참아왔던 눈물을 터뜨리듯 그녀의 어깨 위로 무너져내린 등을 몇 번이고 토닥여주자 소년은 잠시 후 훨씬 안정된 모습으로 몸을 일으켰다. 바보, 늘 혼자 다 참으려고 하고. 내가 옆에 있어줘야 한다니까. 일부러 장난스럽게 핀잔을 주자 그가 아직 붉게 부어오른 눈으로 조금 웃었다. 고마워, 아키. 그 작은 미소가, 어릴 때부터 수천번도 더 봐왔던 안심한 얼굴이 너무도 눈이 부셔서, 후지노는 지지 않도록 한껏 환하게 웃어보였다. 참지 못한 눈물 한 방울이 활짝 미소짓는 눈꼬리 사이로 부서져 순간 흰 빛으로 시야가 가득찼다.

 

좋아한다는 것.

네가 나에게 받길 원하지 않는 것.

그럼에도 멈출 수 없는 것.

 

울지 마. 절대로 잘 될 테니까.”

 

후지노 아키는 사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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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류아키☆륭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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